2020서울사진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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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여성 사진가를 찾아서

한국 최초의 여성 사진가는 현재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천연당사진관에서 ‘부인사진사’로 활동했던 ‘향원당’(香園堂, 당호명(堂號名)으로 보임)으로 알려져 있다. 천연당사진관은 고종의 시종으로 있었던 김규진이 평양에서 사진업을 하던 박주진을 고빙하여 1907년 7월 석정동에 개설한 사진관으로, 조선인 사진관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렸다.
천연당사진관은 개업 초부터 여성 고객을 촬영할 때는 별도의 공간에서 여성 사진사가 촬영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는데, 내외법이 엄존했던 시대에 사진관 고객의 절반인 여성 고객이 편히 촬영할 수 있도록 여성 사진사를 고용한 것이다. 1907년 10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부인사진사 향원당’ 단독 명의로, 1908년 2월에는 김규진과 향원당의 공동 명의로 광고를 싣는다. 그리고 “부인 사진은 처소를 각별 엄숙하고 여인이 백히오며”라며 여성 고객을 붙들기 위해 노력했다. 여성 고객의 수요를 늘리기 위한 여성 사진사의 고용은 천연당사진관만의 영업 전략은 아니었다. 이보다 먼저 일본인 사진관이었던 생영관(生影館)과 경성사진관에서 여성 사진사를 고용했다는 광고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1900년대 초반에 이미 여러 명의 여성 사진사들이 경성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사가(寫眞史家)인 최인진은 향원당을 김규진의 부인 김진애로 추정한 바 있으나, 이들이 실제로 동일 인물인지 확인하는 것이 향후 과제로 남아 있으며, 1900년대 초기 일본인 사진관에서 활동했던 여성 사진사의 국적과 실명을 밝히는 일도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한국 최초의 여성 사진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성 최초의 ‘부인사진관’

현재까지 실명(實名)과 활동 이력이 확인된 첫 여성 사진가는 이홍경이다. 그는 직업 초상화가인 남편 채상묵(채용신의 3남)에게 사진술을 배워, 1921년 종로구 관철동 우미관 앞에 ‘부인사진관’을 개설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는 “경성에 부인사진관 개업은 이홍경 여사가 처음”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조선인 사진사(寫眞師)의 수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1920년대 초 이홍경은 유일한 조선인 여성 사진사였다. 여전히 내외법이 잔존하여 구(舊)가정의 여성들이 초상사진을 촬영할 때 여성 사진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실력 또한 뛰어나서 개업한 지 10개월 만에 사진관 건물을 2층으로 확장하고 제반 설비를 확충했다.

1924년을 전후하여 남편 채상묵이 초상사진사로 전업하면서 부부가 함께 사진관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때 상호를 ‘조선사진관’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경에는 종로통1정목(현 종로1가)에 지점까지 낼 정도로 성업 중이었다. 그러던 중 1926년 무렵 조선사진관을 이완근에게 양도하고,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경성사진관’을 새로 개업했다.

이 무렵 『조선일보』는 「조선 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라는 연재 기사에서 그 여덟 번째로 ‘사진사’를 소개했는데, 바로 이홍경이 그 주인공이었다. 기사는 조선에 체계적인 사진교육을 받을 사진학교가 없고 1910년에 개설된 YMCA 사진과에서는 남학생만을 가르치다보니 그동안 여성이 사진업을 직업으로 갖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하며, “조선에서 오직 하나인 여자 사진사”로 이홍경을 소개했다. 그는 사진사로서뿐 아니라 사진교육자로도 활동했는데, 1926년 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근화여학교에 ‘여자사진과’가 신설되자, 초대 교사로 초빙되었다.
1900 ~1945s

경성의 여성 사진교육기관

한국 최초의 사진교육기관은 1910년 개설된 ‘황성기독교청년회 사진과’(일명 ‘YMCA 사진과’)이다. 기존에 개설된 목공과, 철공과와 함께 사진과가 신설되어, 최창근이 초대 교사로 활동했다. 이외에 서울 중구 다동에 있던 공성학교(초대 교장 유신혁)에 설치된 사진술강습소가 있었으며, 개성에 있던 한영서원(초대 교장 윤치호)에서도 사진과를 운영했다. 그러나 초상사진을 비롯해 전체적인 사진 시장이 산업으로까지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1910년대까지 사진교육은 전문 교육기관 보다는 사진관을 중심으로 한 도제식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거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1920년대 들어 초상사진의 대중화와 함께 사진 수요가 폭증하자 이에 발맞춰 남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사진학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는 근화여학교에서 직업교육 차원에서 사진과(여자사진부)를 신설하고, 경성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이홍경을 초대 교사로 초빙했다. 그러나 이 사진과는 오래가지 못하고, 1927년경 폐지되었다. 여성 사진사로서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31년 4월 지금의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중학교 및 부속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명성여자실업학원에 사진부가 설치되면서 여성을 위한 사진교육은 다시 이어졌다. 또한 1932년 1월부터는 ‘YMCA 사진과’ 내에 여자부가 설치되어 운영되기에 이른다. 비록 3개월의 단기 과정이었지만 주로 남성들에게만 장려되어온 사진기술교육이 여성에게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1934년 ‘YMCA 사진과’의 후신인 경성사진학강습원에서도 여학생들을 모집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수강생들이 점차 늘어났다. 이처럼 1930년대 들어 사진사라는 직업이 여성들에게 적합한 유망한 직종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러 사진교육기관들이 설치되었다.

한국 최초의 사진학 석사

이혜숙은 한국 최초로 사진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사진전공이 신설된 것은 1954년의 일로, 1963년까지 임응식의 지도로 1명의 석사와 10여 명의 학사를 배출했다. 이혜숙은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1954년 입학해 1959년 졸 업하고,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61년에 『사진론: 특히 창작이론에 관하여』(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61)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재학 중인 195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부산대학교 사진반 등 3개 대학의 학생들로 조직된 전국대학생사진연구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58년 한국사진작가협회 (1952년 창립)에서 주최한 《제9회 사협전》과 《제10회 사협전》의 일반공모 부문에서 각각 예술원회장상(특선)과 사협회장상(특선)을 받았으며, 《제11회 사협전》부터는 회원 자격으로 출품했다. 1961년 한국미술가협회(1955년 창립)에서 개최한 《제2회 미술전람회》에도 회원 자격으로 사진부문에 출품했다. 1964년에는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사진부문에 입선한 바 있다. 또한 한국창작사진협회(1954년 창립)의 회원으로 《제2회전》 및 《제5회전》과, 1968년 중앙공보관에서 주최한 《종합미술전》에 출품했다.

대학원 졸업 후 1962년경에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73년경 덕성여자대학 미술대학에서 강사로서 사진학을 담당했으며, 1977년에는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다. 197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세계여성사진전》에 찬조 출품한 한국작가 61명에 포함되었다. 또한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 대학미전》의 사진부문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제4회(1973)부터 제14회(1983)까지 4차례에 걸쳐 유일한 여성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이처럼 사진가로서의 그의 이력은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대중잡지를 통해 본 여성 사진가 8인

1950년대부터 붐을 이루며 창간된 대중잡지에서 활동한 사진가의 대다수는 남성 사진가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8년 2월 『여원』의 「여성 직업의 첨단을 가는 사람」이라는 연재 기사에서 ‘여자카메라 맨’으로 김용순을 소개했다. 그는 1957년 창간한 패션잡지 『미원(美苑)』에서, 1958년에는 희망사에서 사진기자로 활약했다. 또한 1956년 한국사진작가협회와 미국공보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한미합동 “한국가족” 사진전》과 1957년에 열린 《제9회 사협전》에 유일한 여성 회원으로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대학 사진동아리 출신이거나, 사진을 전공한 여성 사진가들이 등장했다. 민경자는 숙미회와 현대사진연구회의 회원으로 있으면서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여원』의 사진기자로 일했는데, 1964년 10월부터 새로 기획된 「포토 스토리」란과 1965년 4월 시작한 「팔도여성 풍물지」란을 담당했다. 숙미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박영숙도 현대사진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65년 『여상』에 입사하여 5월부터 새로 시작한 연재물 「시와 사진」을 맡아, 시를 시각적으로 해석한 감각적인 사진들을 다수 게재했다. 문예는 1964년 서라벌예술대학 공예과로 입학했다가, 사진과로 전과하여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66년 졸업 후에 『여원』에 입사하여 민경자가 진행했던 「팔도여성 풍물지」를 맡았으며, 1968년까지 활동했다.

한편 『여상』에서는 1965년 4월호부터 「여류초대작가의 사단」이라는 연재를 통해 여성 사진가들을 소개했다. 박영숙과, 1963년 《U.S.카메라콘테스트》와 《독일 플뢴국제사진전》에서 입선한 김선옥과 김정희, 1964년 《베를린국제사진살롱》에서 입선한 장양환, 《제1회 전국대학생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한 최방환 등 4명으로, 이들은 모두 현대사진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다. 최방환은 박영숙 퇴사 직후에 『여상』 사진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성 사진가의 등단 과정과 활동 공간

이 섹션에서는 세 개의 등단 경로별로 여성 사진가의 활동을 살펴본다. 먼저 첫 번째 경로는 사진단체 회원으로 활동한 경우인데, 한국사진작가협회, 신선회, 현대사진연구회, 한국창작사진협회, 청록회 등 5개 주요 사진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 사진가들을 살펴보았다. 사진가들의 활동은 주로 사진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며, 정기적으로 열린 회원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남성 중심의 사진단체가 여성 회원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의 일로,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에 1957년 김용순이 입회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다음의 경로는 각 대학 사진동아리를 통해서 활동한 경우이다. 1956년 창립된 부산대학교 사진반(사진예술연구회)을 필두로, 서울대학교 의대 사진반(1961년)과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반(숙미회, 1961년), 서강대학교 사진반(서광회, 1963년 창립), 한양대학교 사진반(HYPO, 1965년), 고려대학교 사진부(호영회, 1966년), 서울여자대학교 사진반(1966년), 연세대학교 사진반(연영회, 1966년) 등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1960년대 여성 사진가들의 폭발적인 등장을 이끈 것은 서울여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등 여자대학의 사진동아리였다. 숫자적으로 보면 숙명여대의 숙미회(1961년)와 이화여대의 각 단과대학 별 사진동아리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사진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함으로써 등단하는 경우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여성 사진가들은 남성 사진가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외에서 개최한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등단하기 시작했다. 여성 사진가들의 숫자는 남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일반 사진공모전에 입상한 여성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사진공모전을 살펴보면 여성의 비율이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간다. 여기에서는 《사협전》, 《동아사진콘테스트》,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신인예술상》과 같은 주요 일반 공모전, 해외 국제공모전과 함께, 1965년 경북사진협회(예총경북지부 산하 사진협회)가 개최하기 시작해, 1966년부터 한국사진협회에서 주최한 《전국대학생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입상한 여성 사진가들을 소개한다.
1945 ~1960s

《대학미전》과 신인 여성 작가의 등단

《전국대학생사진콘테스트》와 함께 대학생 사진가들의 등장을 견인했던 또 하나의 대학생 공모전은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의 일환으로 1970년부터 열린 《대학미전》이다. 사진동아리 회원들이 다수 출품했던 《전국대학생사진콘테스트》와 달리 《대학미전》 (사진부문)은 사진전공을 포함한 미술 각 분야 전공자들이 주로 출품한 예비 작가들의 발표 무대였다. 그 결과 《제1회 대학미전》과 《제2회 대학미전》의 사진부문에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 학생들이 모두 금상을 차지했다. 그중 제1회부터 제19회까지 입선·입상한 여대생 사진가들을 살펴본다. 《제1회 대학미전》에서는 김동희가 대상을 받았으며, 《제3회 대학미전》에서는 임향자가 특상 1석에 올랐다.

광고 분야 활동 작가

이 섹션에서는 특히 여성의 진출이 어려운 분야였던 광고사진에서 선구적인 활동을 보인 여성 사진가들의 흔적을 찾아본다. 먼저 김애경은 미국 『보그』지 및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캐디 킴’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1971년에는 뉴욕 중심가에 ‘캐디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1971년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한 손영자는 1981년 인사동에 스튜디오 ‘산’을 열고 미술품을 전문으로 다루었다. 1987년에는 한국광고사진가협회(KAPA)에 가입했으며, 1994년까지 《한국광고사진가협회전》에 광고사진을 꾸준히 출품했다. 뉴욕에서 활동한 상업사진가 이정애는 보석, 핸드백, 시계, 그릇, 화장품 등 주로 제품사진을 촬영해왔으며, 1995년 뉴욕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사진 출판물로 보는 여성 사진가

한국에서 1970년대까지 개인 사진집의 출판은 매우 소수에 그쳤으며, 여성 사진가의 개인 사진집 출판은 전무했다. 그러나 1980년을 전후로 시각매체 전반을 다루는 전문 출판사(열화당, 미진사 등)와 사진 전문 출판사(도서출판 시각, 눈빛, 해뜸)가 등장하면서 사진집 발행도 늘어났고, 여성 사진가들도 앞 다투어 개인전에 맞춰 사진집 발간에 나섰다. 김동희, 김민숙, 김영임, 김정애, 송영숙, 오순자, 이진섭, 이정진 등이 여러 출판사를 통해 작품집을 출판했다. 이 섹션에서는 여성 사진가들의 사진집을 아카이빙 했으며, 1980년대에 활동한 여성 사진가들을 폭넓게 소개하기 위해 사진잡지에 실린 화보 이미지와 전시도록 및 리플렛 등에 수록된 인쇄사진도 함께 모았다.

사진 교육의 확대와 전문 여성 인력의 배출

1964년 서라벌예술대학교에 사진과가 설치된 이후로, 전문대학과 종합대학에 순차적으로 사진학과가 개설되었다. 1960년대에 한 곳에 불과하던 사진학과는 1970년대에 3곳으로, 1980년대에는 9곳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사진학과의 증가는 사진 수요의 증대에 따른 사진 인력 수급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중앙대학교와 홍익대학교를 시작으로 숙명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사진전공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석사학위를 받은 전문 여성 인력(류기성, 박영숙, 홍미선 등)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유학파 여성 사진가(김민숙, 김테레사, 신혜경, 이정애, 임향자, 한옥란 등)들과 함께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다양한 사진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리고 김민숙, 박영숙, 홍미선 등은 사진이론 및 비평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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